남단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주변 지형을 고전적 풍수지리 관점에서 분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단은 원래 조선 초 북교와 남교에서 지제(地祭)와 천제(天祭)를 지냈던 곳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유교적 관점에 맞지 않아 곧 원구단의 천제가 폐지되며 원구단은 원단에서 남단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국가적 큰 제사였던 대사(大祀)에서 풍운뇌우단의 중사(중간 단계의 제사)로 축소되며 기우제 정도를 지내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원구단을 도성 내 현 조선호텔 부지 남별궁 터에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남산 아래쪽의 산 이름은 용산이 아닌 둔지산이었으며 당시에 용산이라는 명칭은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현재 원효대교 부근으로 빠지는 만초천 바로 서쪽의 산의 명칭이었습니다. 용산은 조선왕조실록 내내 수백회 등장합니다만, 현재의 용산이 아닙니다. 현재의 용산인 둔지산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4회 정도 설명에 그치는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약하였습니다. 다만 그 이유는 둔지산은 이름 처럼 군의 진지가 있던 곳으로 서울을 방어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대문의 남쪽을 한강과 함께 지켜주는 용도였기 때문입니다. 즉 중요도가 높으면서도 군사적 요지였기에 함부로 정보를 노출 시키는 곳은 아니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조도 남단을 과거의 원구단이니 중요하게 취급하며 주변 50보(步) (약 300m) 가량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 시키기도 했었습니다.
만초천은 인왕산에서 발원하였기고 꽤 큰 하천이었기에 물길이 청계천과는 달리 꽤 수량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곳을 통해 군사적인 위험이 될 수 있었기에 하륜이 남대문까지 물류 통로 등을 요청했음에도 아예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저도 용산에 대한 명칭의 역사를 몰랐을 때는 아 용산은 항상 패권의 중심지였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용산의 조선시대 기록을 알게 되고 다시 지형을 살펴보면서 이곳은 이름처럼 군사적인 기지의 역할이며 단지 서울(사대문 안)을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물길의 흐름을 보면 북쪽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남산 아래의 산맥의 흐름 또한 그렇습니다.
이것을 풍수에서는 산수동거라고 하는데 산과 물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흐른다는 뜻입니다. 보통 산과 물은 서로 마주보아야 좋게 보는데 이렇게 같이 흐르는 것은 서로 만나지 못해 좋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보통 명당으로 알려진 곳은 산의 방향이 동에서 서로 마무리 된다면 물길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식입니다. 지도상으로 남단(현 전쟁기념관 바로 위 능선 끝) 까지는 어느 정도 물길의 방향이 꺾이기 전이고 좌우 산맥이 막아 주고 있어서 좋게 볼 수 있습니다만, 전쟁기념관 아래쪽은 만초천의 흐름에 있어 물과 산이 서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또 반궁수에 해당하는 점은 아쉽습니다. 만초천의 궁수 부분은 만초천의 서쪽으로 당현 쪽이 동쪽보다 이치적으로 좋습니다.
또 조선시대 만초천 부근의 용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용안, 용상, 곤룡포 처럼 임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록에서 찾아보니 기우제를 지내는 목적의 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용산 또는 용산강에서 침호두(沈虎頭)를 만들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침호두란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 범 모양을 만들어 용산강(龍山江)에 담그는 것을 말하는데 강한 범을 강에 바쳐 비를 내리게 하려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용은 辰으로 표기하고 올해도 甲辰년인데요. 신자진(申子辰) 원숭이, 쥐, 용은 셋 다 합을 이룰 때 水의 기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즉, 용산 및 용산강(만초천)은 기우제 지내는 장소의 뜻이 강한 곳입니다. 또 둔지산은 군사기지 이고요. 오로지 사대문 안 법궁인 경복궁만이 왕의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추후 화재로 인해 창덕궁, 경희궁 등도 불가피하게 이궁으로서 사용되었으나 법궁으로서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뉴스 기사를 통해서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국방부 청사와 3군 총장공관을 연결하는 도로는 과거에 물길일 확률이 거의 99%입니다. 그러면 그 아래쪽에 자리했다면 아무래도 용맥을 타고 있을 확률은 낮아 보입니다. 또 반궁수에 위치해 있고 또 산수동거하는 자리입니다. 또 제가 유튜브에서 보니 한 분이 이곳에서 관악산을 보는 동영상 강의를 하고 계셔서 저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직접 가보면 빌딩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보입니다만 맵을 통해서 보면 이런식으로 보이게 됩니다. 관악산의 화기가 진짜 그래픽임에도 쎄 보입니다.
그러면 현재 용산은 참으로 안타까운 곳입니다. 군사적 요지임은 맞으나 편안한 곳은 아닙니다. 안산이 저렇게 험한 관악산인데 코앞에 있네요. 이름도 원래 둔지산 진을 치는 곳이란 뜻이고요. 지역의 이름을 보면 과거의 역할에서 전혀 변동이 없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둔지산이 용산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조선후기의 지도에는 모두 둔지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부근을 모두 합쳐 용산으로 부른것은 일제강점기부터 바뀐것 같습니다. 저 때만 해도 만초천 서쪽을 용산으로 표기해 두었네요.
중간의 네모칸 두개는 보병영으로 좌측에는 현재 전쟁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네요. 지도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네요.
완전히 일제강점기에 접어 들자 1927년에는 아예 용산시가도라는 이름으로 따로 제작된 지도도 있네요.
힘은 가질 수 있으나 인왕산에서 발원한 강한 하천의 반궁수에 위치하고 또 화기가 넘치는 관악산이 바로 보이고요. 그러니 참 무서운 터인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심리적으로 포악한 사람이 저 곳에 들어가니 문제가 심각해 지게 된 것 같네요.
그런 장소로 간다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영향을 받게 되는데 누가 어떤 곳에 가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랬던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저 곳은 산수 동거하는 곳이라 힘이 모이지 않는 곳입니다. 청나라군대도, 일본군도, 미군도 다 철수 하였죠.
윤석열 본인도 망해가지만 결국 우리나라도 크게 손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동기 감응이라고 비슷한 기운끼리 끼리끼리 모이는 법인데 저 곳이 땡겼나 봅니다. 다음 대통령이 계속 저기 가는 것도 문제일 수 있고 청와대는 개방되었고 이래 저래 큰 손실입니다. 다른 안정된 곳으로 옮겨야 할 텐데 참 큰일입니다.
하필 옮긴 곳이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라니 일본이 진짜 우리나라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 경각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한 규모는 모르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는 일본인들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서 잘 지내면 다행인데 일본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서서 한국 보다는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 활동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드네요.
그런 생각은 거의 한 번도 하고 산 적이 없었는데 이번 계엄 사태로 풍수 논문 때문에 조선시대의 역사를 깊게 접하면서 이상했던 점들이 조금씩 연결이 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일본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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