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사망 Queen Elizabeth II Dies

이지 easy 2022. 9. 9. 04:03
반응형

방금 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발표되었습니다. 

1926년4월21일 ~2022년 9월 8일 96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현재 전 세계의 군주들 가운데서도 최고령이자 가장 오랬동안 재위에 오른 군주로서, 올해 2022년 2월 6일에는 즉위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최근 코로나에 걸려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식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는데 결국 노환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한것 같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왕위는 찰스 왕세자가 바로 이어 받게 됩니다. 

 

현재 가족은 찰스 왕세자 부부, 앤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등 여왕의 네 자녀가 있으며, 찰스와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의 세 자녀 조지, 샬럿, 루이가 있고 , 차남 해리 왕자와 레이첼의 자녀 아치, 릴리벳이 있습니다.

 

여왕은 지난 6일 밸모럴성에서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의 사임을 보고받고,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를 임명하는 행사를 치렀습니다. 1926년생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45년 공주 신분으로 입대해 운전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아버지 조지 6세의 서거 이후인 1952년 2월 왕위에 올랐습니다. 여왕은 재위 중 최근 취임한 리즈 트러스 등 15명의 영국 총리와 함께 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와 유럽연합 EU 결성, 영국의 EU 탈퇴 등의 격랑 속에 영국 사회를 안정시키고 연방 유지의 상징 역할을 해왔습니다. 건강은 지난해 4월 99세였던 남편 필립 공의 사망 이후 급격히 쇠약해져 10월엔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올해 2월에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뒤, 5월 의회 개원 국정 연설(Queen's speech)에 59년 만에 불참했고, 6월 열린 즉위 70주년 나흘간 행사에 발코니에서 두 번 잠깐 모습만 보이는 등 대외활동을 취소해 왔습니다.

 

엘리자베스여왕결혼
1947년 필립공과 결혼 - 필립공은 그리스인이며 에든버러대학에서 만나 결혼

 

엘리자베스2세와 남편 필립공 위 2011년/ 아래 대관식 1953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 가계도 출처-https://blog.daum.net/ghyeon/36

 

1973 앤공주 결혼 필립스

 

1981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비 결혼
1986 앤드류 왕자 사라 결혼
1992 앤공주 티모시 재혼
1997 다이애나 영결식
1999 에드워드 왕자 소피 결혼
2011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결혼
2018 해리왕자 매건마클 결혼

 군 복무

1945년,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하여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 3월 4일 그는 또래 여자들이 봉사하는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하여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WATS; 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배치되었다. 여자들로 구성된 WATS는 1938년 창설 당시에는 주 업무가 취사, 사환 업무, 부대 내 매점 관리 등의 비(非) 전투업무였으나, 전쟁이 커지자 운전, 탄약 관리 등의 전투업무로 확대됐다. 그곳에서 엘리자베스는 군번은 230873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윈저 소위로 불리며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사로 복무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운전과 탄약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왕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흙바닥에 앉아 차량을 고쳤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트럭 바퀴를 교체하는 모습, 트럭의 보닛을 열고 수리하는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 당시의 활동모습을 말해 준다.[3] 다만 왕위 계승권에 들어가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병이나 부사관으로서는 군복무를 할 수가 없었고 무조건 장교로 강제되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공주의 보직 호칭은 보급수송장교였으며 제대할 때의 계급 역시 대위였다.
여성 왕족 가운데 다른 학생들과 동등한 훈련을 받으며 군 복무를 한 사람은 현재까지 그가 처음이자 유일하다. 비록 이전의 왕들이 영국군과 캐나다군의 최고 사령관이기는 했지만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왕실 여성에게는 명예상의 직함만 주어졌을 뿐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경험을 무척 기쁘게 했으며, 이 경험을 통해서 자기 아이들을 궁정에서 가르치기보다는 학교에 보내 공부시키는 게 낫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브이이 데이를 기념하는 동안 그와 그의 여동생 마거릿 공주도 모두와 함께 축하하며 한밤중까지 군중과 어울렸다.
출처: 위키백과

결혼 

엘리자베스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립 왕자와 결혼하였다. 이들 내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방계후손으로 재종숙질녀간이다. 한편, 빅토리아를 조상으로 두어 삼종 남매뻘 이기도 하다.
필립은 그리스에서의 왕위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고, 결혼에 앞서 에든버러 공의 작위를 받기 전에 간결하게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로 불렸다. 필립은 그리스 왕족으로 덴마크 왕실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사운덴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자 올덴부르크 왕가의 계통이었다. 둘의 결혼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필립이 영국의 국교회인 영국 성공회의 신자가 아닌, 정교회 신자인 데다가 뒤를 받쳐줄 후원 세력도 없었고, 영국의 적성국가였던 나치 독일 지지자와 결혼한 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도 강력히 반대했다고 하며, 심지어 필립을 “훈족”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진작에 알았던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가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47년 7월 두 사람의 약혼이 선포되고 1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두 사람은 1949년 7월 4일까지 윈들즈햄 무어에 살았으며, 나중에 대저택인 런던의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하였다. 슬하에 총 3남 1녀를 두었다.
출처: 위키백과

정치

엘리자베스 2세는 입헌군주 답게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세 내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자제를 고수해왔다. 따라서 그녀의 정치적 관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적절한 선에서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국가수반으로서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매년 가을 영국 정부의 정책을 요약하는 개회사와 함께 의회의 새로운 회기를 연다. 또한 왕은 선거를 통해 영국의 총리가 선출되면 그를 임명한다.
영국은 명예 혁명 이후로 국왕이 내정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군주에게는 암묵적으로 지속돼 온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있었다. 집권 세력이 의회에서 불신임됐을 때 새 총리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두 차례 총리를 지명한 적이 있었지만 논란에 휩싸이자 1965년 이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다.

사회적으로는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후 남편과 함께 영국 각지의 기관, 기업체, 지역사회 등을 방문하여 많은 내외국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지금까지 38만 7천700건의 서훈식을 치렀다. 더불어 영국 적십자사
, 영국 문화원, 영국 학술원 등을 포함한 620개가 넘는 자선단체와 기관을 후원하고 있다.

2007년 12월 24일, 엘리자베스 2세는 유튜브에 전용 동영상 사이트를 개설하였다. 로열채널이라는 이름의 이 사이트(www.youtube.com/theroyalchannel)에서는 영국 왕실의 일상에 대한 옛 뉴스와 각종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해 하회마을과 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녀갔으며, 2004년에는 영국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만났다.

2011년 5월에는 영국 군주로서는 할아버지인 조지 5세 이후로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하여 양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2012년 6월에는 독립을 요구하며 오랫 동안 유혈 분쟁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북아일랜드를 방문하여 그의 사촌 마운트배튼 경을 암살한 주범인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의 총사령관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가족사

조심스럽게 입지를 세운 영국 왕실의 권위는 그의 자녀에 의해 실추되기 시작했다. 딸인 앤 공주는 당시 소시지와 고기 파이를 만드는 회사를 가진 평민의 자녀인 마크 필립스 대위와 결혼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이 결혼은 결국 1982년에 이혼으로 끝나면서 더욱 국민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
마저 1978년에 공식적인 파혼을 하면서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혼 전부터 염문을 많이 뿌리고 다니던 웨일스 공 찰스는 1981년 7월, 정숙하고 가문 좋은 스펜서 가문의 딸이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왕실의 권위는 다시 회복되는 듯하였다. 둘 사이에서 윌리엄 왕자와 헨리 왕자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결혼 전부터 사귀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잊지 못하던 찰스는 결혼 1년쯤 뒤부터 다이애나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찰스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반면, 다이애나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무도희나 파티 등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취미나 취향은 정반대였다. 반면에 카밀라 파커 볼스는 찰스와 같이 여러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어떤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986년부터 심심찮게 웨일스 공 부처의 불편한 관계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96년 이혼을 하면서 국민의 실망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거기에 같은 해 둘째 왕자인 요크 공작 앤드루도 사라 퍼거슨과 이혼을 하면서 충격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건은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 도디 알 파예트와 함께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국민의 원망이 찰스에게로 돌려지면서 왕실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1992년 다이애나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왕실의 뒷이야기를 다룬 《다이애나-그녀의 진실》이란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밝혔었다. 그 내용은 대중매체를 타고 영국 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고, 이로써 그녀에 대한 동정과 왕실과 찰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이 커졌다. 이후 찰스 대신 그 아들인 윌리엄을 왕위 후계자로 삼자는 의견과 심지어는 영국 왕실을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했으나, 2011년 4월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을 계기로 왕실에 대한 호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렇듯 언급된 여러 문제에도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유지되는 것은 엘리자베스 2세의 지혜로운 처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