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가끔 채희석 샘의 채널을 보는데 한 영상을 보며 예술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말로써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말이나 글이라는 것은 매우 표현이 제한되어 있다.
자연의 무지개는 우리가 그림에서 본 것처럼 색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투명하며 색과 색 사이에 그러데이션 영역이 존재하는 게 자연이다. 언어로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등 매우 거칠고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징으로서만 표현이 가능하다. 아마도 무지개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지개라는 단어와 그 설명 만으로는 실제와 똑같이 상상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실물을 봐야만 그 크기며 색상의 실제 느낌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술가는 언어적 제한성을 뛰어 넘는 작품을 통해 그 그러데이션과 채도, 명도, 색상, 질감 등의 섬세한 조합으로 보다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가 있다.
음악가도 마찬가지다. 물론 피아노는 제한이 있지만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은 선을 따라 진동을 하면서 악보에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도 실제로는 낼 수 있다. 새소리는 악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자연의 새소리를 좋아한다. 그 작고 가볍고 산뜻하고 명쾌한 느낌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장자는 도는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오로지 직관 만으로 도를 알 수 있으며 이를 언어로 말하는 순간 도가 아니게 된다고 했다. 언어의 제한성은 도의 변화무쌍한 파동을 잡아 낼 수 없기 때문인데 나는 이 표현을 들으며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이 생각이 났다. 이중 슬릿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관찰이 되지 않은 광자는 자유로운 파동의 운동성을 보여준다. 슬릿을 확인하는 것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처럼 입자가 되어 위치가 확정된다. 그것은 어떤 박제된 상징이 되어 더 이상 움직임과 파동성을 가진 도라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다양한 느낌을 직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서로 공명하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다양한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서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말로서 모든것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를 시도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 사람은 도를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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