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

황로학 휴양생식과 형명론

이지 easy 2021. 10. 30. 13:20
반응형

서론

1973년 마왕퇴의 한대묘지에서 󰡔주역󰡕과 함께 󰡔노자󰡕 백서가 발견되었다. 이 백서는 󰡔經法󰡕, 󰡔十六經󰡕, 󰡔󰡕, 󰡔道源󰡕이라는 황로학의 4가지 경전과 함께 초록되어 있었다. 이는 전한시대의 주류였던 황로학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黃老라는 명칭의 쓰임이 처음 발견된 것은 전한시대 사마천의 󰡔사기󰡕 에서였다. 黃老는 삼황오제의 黃帝老子에서 따온 말로써 황제의 권위와 도가사상을 결합한 단어이다. 󰡔사기󰡕에서는 황로학이 전국시대 중기에 발생하여 제나라에서 유행했다고 전한다. 주요 전파자는 송견, 윤문, 신도, 전변이며 법가의 신불해와 한비도 이를 다루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비자는 형명과 법술의 학문을 좋아했으며 그것이 귀의하는 것은 황로에 근본을 두고 있다.라고 하였다.

황로학의 기본사상은 淸靜無爲로써 제나라의 조참에 이어 한나라의 소하에 이어지며 前漢초기 70년간 안정적인 통치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에는 한계를 드러내며 변질되어 후한 동중서의 유교이념이 새로운 통치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 중기에 발생하여 전한시대를 이끌다가 힘을 잃게 된 황로학은 어떤 특성이 있으며 왜 영향력을 잃게 되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 休養生息의 시대적 요구

 

1. 가가 보는

전국시대 중기에 발생하기 시작했던 황로학의 청정무위 사상은 제나라에서 발전하였으나, 법가의 한비자가 깊은 관심을 보였다. 법가의 사상은 왕의 권위와 법의 규율성을 절대적으로 중시하기 때문에 무위자연으로 통하는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한비자와 같은 법가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한비자는 도의 드러나지 않으면서 영향을 끼치는 개념을 왕의 통치 개념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힘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더욱 강력한 권위와 힘의 추구에 무위의 도는 매력적인 요소로써 이용되었다.

 

2. 휴식의 필요성

강력한 법의 힘을 통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진나라의 통일로 완성한 법가는 지나치게 엄격한 법으로 인해 너무나 빠른 멸망을 맞게 되었다. 비현실적이고 가혹한 법의 적용으로 인해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줄 방법은 휴양생식의 황로학 뿐이었다. 춘추전국 시대의 노장사상은 개인주의였기에 백성들과는 괴리가 컸으며, 유가, 묵가 또한 명분을 잃었으며, 법가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었다.

또 한가지는 전란을 겪고 혼란 끝에 수습된 전한 초기 국가를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치개념이 필요했는데 황로학은 백성들 뿐만 아니라 통치자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휴식을 통해 안정을 취하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위해 세금을 줄였으며, 폭정으로 알려진 진나라와는 다른 노선을 택함으로써 새로운 나라의 면모를 세우고자 했다.

 

3. 사상적 통합

사상과 나라가 흩어져 있던 춘추 전국시대의 말엽부터는, 국가가 진나라로 통일이 된 것처럼 사상 또한 혼합의 경향이 나타났다. 여불위는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명가, 농가를 모아서 잡가를 만들었다. 황로학은 도가와 법가의 융합이 더욱 두드러졌다. 자연의 도인 天道, 스스로 그러함의 自然, 일부러 행하지 않는 無爲, 부드러움을 숭상하는 尙柔, 유함을 지키는 守雌와 같은 부드럽고 여성스러움이 강조되는 정책이 한나라 초기에 사용되었다. 이는 도가의 입장에서 법치와 덕치를 결합한 것으로 정치, 문화, 학술적 측면의 수요와 일치하였다.

 

. 황로학의 도가적 측면

 

1. 六家要旨를 논함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 정리한 󰡔論六家要旨󰡕 는 유가, 묵가, 도가, 법가, 음양가, 명가에 관한 내용과 함께, 황로학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것의 가르침은 음양의 순리적 흐름을 따르며 유가와 묵가의 훌륭한 점을 채용하고 있으며, 명가와 법가의 요체를 취하고 있다. 시대와 더불어 변이하며 사물에 응대하여 변화를 이루고 세속 안으로 들어가 구체적으로 일을 시행함에 있어 적절하지 않음이 없다. 그 가리키는 바가 간략하여 잡아 지키기 쉽다. 구체적으로 하는 일은 적지만 그 효과는 대단하다.”라고 하였다. 보충하면 무위자연설을 근간으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측면에, 황제와 노자를 신격화한 태상 노군을 숭배하며, 노장철학을 받아들이고,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을 더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한 복합적인 학설이다.

또한 󰡔황로백서󰡕를 통해 본 황로학은 춘추전국시대의 자유롭고 풍성했던 제자백가의 장점을 모아 도가와 법가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2. 황로학이 보는 도가

󰡔황로백서󰡕4권 중 하나인 󰡔道源󰡕에서는 도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도를 천지자연계가 생겨난 근본으로 삼아 , , , 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설명하였다.

하나라는 것은 그 호칭이고, 허라고 하는 것은 그 머무는 집(공간)이며, 무가 그 바탕이다. 화는 그 쓰임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허는 비어 있는 공간적 개념을 의미하며, 바탕 또한 비어있는 자체를 바탕으로 보고 있고, 조화는 작용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노자󰡕에서는 여러 가지 도에 관한 문장이 나오는데, “도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셋이 생기고, 셋에서 만물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萬物生於有生於無라고 하여 만물은 유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무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一陰一陽之爲道라고 하여 한번 음이되고 한번 양이되는 것이 도이다.”라는 정의도 있다. 황로학의 도와 노자의 도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깊은 이해가 필요한 주제임에 반해 단편적인 문장 하나로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3. 황로학의 천도관

황로학에서 말하는 은 순자의 관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순자는 󰡔天論篇에서 天行有常을 주장했다. “자연의 운행은 항상됨을 가지고 있어서 요임금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임금 때문에 없어진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자연의 운행은 요, 걸과 아무 상관 없다. 순자는 하늘은 시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고 땅은 재물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그 때와 재물을 이용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황로학에서 말하는 천지관 몇가지를 살펴보자. “천지의 일정한 법칙은 4계절이 있다. 어둡고 밝음 삶과 죽음 부드러움 강함이 있다는 것이다.”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지만 백성들이 어두워짐을 걱정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그집의 문을 열어서 각각 거기에서 밝음을 취한다. 하늘은 그것을 일삼는 법이 없다. 땅은 재물이 있지만 근심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가난한 것을. 백성들은 나무를 베거나 땔나무로 각각 거기에서 부유함을 취하는데 땅은 그것을 일삼는 바가 없다.”하늘은 추위와 더위를 제어하고, 땅은 높고 낮음을 만들고 사람은 그것을 선택한다.”사시의 법도에 순응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병든다.”자연에 앞서 이루지 말고 (가을 전에 거두지 말고) 때가 아닌데 꽃피우지 말라, 자연에 앞서 이루게 되면 훼손될 것이고 때가 아닌데 꽃을 피우면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추울 때에 홀로 덥거나 더울 때 홀로 차가우면 그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그것을 거슬렀기 때문이다.”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자는 번창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할 것이다.”

위에서 나온 황로학의 천도관의 요지는 사람은 사사로움이 없이 한결같고 규칙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살라는 것이다. 이 법칙을 잘 따르는 자는 흥하게 되고 자연법칙을 어기는 자는 피해를 입는다는 주장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이 돋보이는 이 부분은 순자와 노장사상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 황로학의 법가적 측면

1. 形名學

법가에서 말하는 刑名의 명은 법령을 뜻하며, 형은 법령에 따른 실제 업적을 말한다. 결국 형명이란 법령과 실제 업적의 결과를 얼마나 엄격하게 일치시키느냐의 문제였다. 법령을 지키는 것은 사회질서유지에 있어 중요하지만 예외가 없는 일방적인 엄격함으로 인해 결국 진나라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법의 획일적인 적용은 이치에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형명이란 실체와 그것을 부르는 이름의 상응에 대한 내용이므로 황로학에서는 꾸준히 명과 실의 일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평소에 법을 가지고 있고, 움직일 때 명에 순응하면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평소에 법이 없고 무시할 때 이름을 혼란시키면 이 때문에 형벌을 받아 죽게 될 수 있다.”라거나 “(어떤 사람이 장차 아서 맞이할 때)다만 눈으로 보고 말이 한결같고 행실이 한결같으면 그 사람을 얻어야 하며 잃어서는 안된다.”, “한마디 말은 있지만 한 마디 행실이 없으면 그것을 일러 거짓이라고 한다.” 와 같은 문장이 그것이다.

다만 항상 변하는 실체와 변하지 않는 명의 일치성에는 언제나 시공간적인 괴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실체의 변함에 따라 이름까지 변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형명론에서도 형을 최대한 명에 부합하여 신뢰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2. 황로학이 보는 사회정치관

황로학설은 실생활 속의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무위사상과 조화롭도록 만든다면 나라와 백성 모두가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소하와 조참의 잘 정리된 법률로 인해 한나라 초기에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유가의 仁義德政을 법가의 통치술과 결합하여 법가에서 권모술수를 통해 신하를 제어하는 방식 대신 예로서 다스리는 사상을 실천하였다.

󰡔황로백서󰡕󰡔󰡕편에서는 어진 신하는 왕의 스승이나 벗이 될 수 있다는 유가사상을 받아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도가의 貴柔와 유가의 惠民 사상을 결합해 적용하였다. 이것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편안하다.” 라는 유가의 민본사상이다. 이러한 인의와 덕정은 동중서의 外儒內法이 만들어지는데 기여하였다. 외유내법은 양유음법이라고도 불리는데 겉으로는 부드러운 유가사상을 채택하지만 실제로는 법가의 엄격함을 적용한 법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불균형하기에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므로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황로 학파의 사상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영향력은 전한 초기였다. 왜냐하면 진의 폐망을 본보기로 하였기에 진과는 대비되는 황로학을 통치사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 황로학의 한계

황로학은 전한 초기에 진나라의 폭정에 대비되는 휴양생식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고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청정무위 사상은 당시의 사회정치적 요구에 잘 맞아 한고조 이후 70년간 정치사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천자와 제후와 대부로 비교되는 정치구조는 중국 지리와 연계되어 점차 시간이 갈수록 그 복잡성이 증가하게 되었고, 결국 친족간의 문제와 땅문제 등으로 인해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초기에 휴식을 위해 주었던 방임 정책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중앙정부를 겨냥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군사력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했던 정책은 반란군이 되어 칠국의 난과 같은 전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고조는 초기 국가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주변의 흉노에게 화친 정책을 사용하였는데, 이후에 인양(忍讓)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참고 사양한다는 뜻인 인양 정책은 흉노의 잦은 침입을 불러와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상인들마저 정부의 불간섭주의를 악용해 농민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위의 다스림은 한계를 맞게 되었으며 점차 유가적 사상이 더 우세하게 되었다.

 

결론

전한 초기에 황로학이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폭정으로 인한 피로감의 해소와 안정을 위한 청정무위와 휴양생식 정책이 잘 맞아 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폭정을 극양이라고 본다면, 황로학은 극음 내지는 음의 정치였다. 양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음의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니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은 균형점을 지나 다시 지나친 음의 시대가 되자 음의 정치가 주가 되었던 황로학은 균형을 잃고 쇠퇴하게 되었다.

황로학이 가진 도가의 청정무위사상을 음이라고 한다면 법가의 형명론은 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상 황로학은 음양의 정책에서 균형점을 찾아 대응할 수 있던 좋은 제도 였다고 생각된다. 황로학이 힘을 잃게 된 배경에서 법가적인 시스템을 좀 더 보강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공에 실을 묶어 회전시킬 때 돌리는 힘이 세다면 날아가 버리고 돌리는 힘이 약하면 회전을 멈추게 된다. 밖으로 나가려는 힘과 그것을 당기는 힘의 조절이 완벽한 균형을 이룰 때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는데 인간이 그것을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엮여 있는 국가 시스템에서 모두가 지속가능한 정치사상을 정립하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도가와 법가의 사상이 어우려진 황로학은 음양의 균형적 측면에서 훌륭한 제도였다고 생각되며 지나치게 양극화된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반응형

'동양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자의 원리 육서六書  (0) 2022.09.21
조선왕조실록 민제閔霽 기록부분  (0) 2022.08.30
60갑자의 규칙성  (0) 2022.02.03
한문의 형식 漢文의 形式  (0) 2022.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