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고전풍수

사고전서

이지 easy 2021. 10. 1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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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는 (四庫全書)는 1773년 (건륭 38년) 청 제국의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 (건륭 46년)에 편찬 및 완성된 총서이다. 전 3,503부 79,337권에 달한다.

개요

전체 구성은 수(隋), 당(唐) 이래로 황실의 도서관이었던 집현서원(集賢書院)에서 황실의 장서를 4부(四部) 즉 경(経) ・ 사(史) ・ 자(子) ・ 집(集)으로 나누었던 것에서 유래해 분류 정리하였기 때문에 사고전서라고 한다. 사부의 책의 표지는 각각 녹색(경부), 적색(사부), 청색(자부), 회색(집부) 등의 색깔로 구분되어 있다.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하고 있으며, 자료의 보존에 막대한 공헌을 했던 반면 청 왕조의 국가 통치에 장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서적들은 금서로 취급해 수록되지 못한 서적도 3천 점에 달한다. 또한 수록되었다고 해도 원서의 내용을 개변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사례도 보이기 있어서 취급에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사고전서 편찬 이후에 보다 우수한 텍스트가 발견되어 교감된 서적도 있는데 이런 경우 비록 사고전서본에 개찬이 없더라도 사고전서본 이외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서의 해제(解題)목록으로써 사고전서총목제요 200권이 작성되었다.

중국 국내의 문헌뿐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의 한적들도 수록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에우클레이데스가 쓴 《기하원본》(幾何原本)이나 예수회 선교사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Sabatino de Ursis)의 저작도 포함되어 있다.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소실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것은 북경도서관 (문진각), 대만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원 (문연각), 간쑤성 도서관 (문소각), 저장성 도서관 (문란원)의 4부가 전한다.

 

 

편찬

청 건륭(乾隆) 38년(1773년) 2월 청 조정은 《사고전서》 편찬을 맡을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을 세우고 총책임자는 건륭제의 제6황자였던 영용(永瑢)이 맡았으며 내각대학사(内阁大学士) 우민중(于敏中)을 총재로 임명하고 대학사 및 6부의 상서와 시랑들이 부총재를 맡았다. 당시 저명한 학자로 칭송이 있던 기윤(紀昀)을 총찬관(總纂官)으로 삼아서 이 방대한 편찬 사업을 개시하였다. 육석웅(陸錫熊)、손사의(孫士毅)、대진(戴震)、주영년(周永年)、소진함(邵晋涵) 등의 학자들도 편찬에 참예하였다. 편찬자 명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문인과 학자만 360명 이상에 달했고 초사(抄寫)를 맡은 인원도 3,600명이나 되었다.

《사고전서》에는 당시 중국 전역에서 모은, 각지에서 유통되고 있던 서적과 청 황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 및 《영락대전》(永樂大典) 가운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책이 수록되었다. 책을 징수하는 기준은 성학(性學, 성리학)의 치법(治法), 전장(典章)을 심사하고 구류백가(九流百家)의 말을 명기한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족보(族譜), 척판(尺牘), 병장(屏障), 수언(壽言), 창수한 시문 등등은 고려 대상에 들지 않았다. 통계에 따르면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징수된 서적으로 밝혀진 것만 13,501종에 달했고 가장 많은 책을 바쳤던 포사공(鲍士恭), 범번주(范懋柱), 왕호숙(汪启叔), 마유(馬裕) 네 사람에게는 특별히 내부(內府)에서 인쇄한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1부씩이 하사되었다고 한다.

건륭 49년(1784년) 4부의 전질이 잇따라 완성되었는데, 완성된 전질은 모두 7부였으며, 우선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문연각(文淵閣), 수도 교외의 원명원(圓明園) 문원각(文源閣), 허투알라 행궁(盛京行宫)의 문조각(文溯閣), 승덕(承德) 피서산장(避暑山莊)의 문진각(文津閣)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이들을 아울러 내정사각(内廷四閣, 또는 북사각北四閣)이라고 하였다. 또한 진강(鎮江) 금산사(金山寺)에 문종각(文宗閣),양주(揚州) 대관당(大觀堂)에 문회각(文匯閣),항주(杭州) 서호행궁(西湖行宫) 고산성인사(孤山聖因寺)에 문란각(文瀾閣)을 세웠는데 이들을 강절삼각(江浙三閣, 남삼각南三閣이라고도 한다)이라고 불렀으며 이곳에 각기 초본(抄本) 1부씩을 소장하였다. 부본(副本)은 수도의 한림원(翰林院)에 보존되었는데, 문연각본(文淵閣本)이 가장 먼저 완성되어 교감이 정밀하고 글자체 또한 깔끔하였다고 한다.

 

편찬목적

1. 국가차원에서 소실되거나 실전될 우려가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모아 보전한다.
2. 반청주의의 온상인 한인 학자들에게 사고전서 편찬이라는 일거리를 주고 이들을 국가적으로 관리 통제한다.
3. 반청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거나 청나라에 비판적인 사상을 담은 문헌이나 자료들을 모아 처리한다.


실제 사고전서는 중국역사상 수많은 문헌들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사고전서의 편찬이 청대 학문을 융성케 하는 데에는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소위 문자의 옥으로 불리는 강희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의 광범위한 사상탄압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사상 전개와 교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건륭제는 귀중한 자료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분량의 서적들을 수집하게 했으며 이 서적들 중 반청주의적이거나 청나라를 비판할 소지가 있다고 여겨진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하여 곧바로 소각처리하였다. 즉 자료를 보전하는 동시에 자료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사고전서에 있었던 것. 사고전서 편찬 과정에서 목판 2800여 종이 파괴되고 책 수만 권이 소각처리되었으며 책 400여 종은 문구를 부분수정하거나 전면수정했다.

 

판본

귀중한 문헌인 만큼 보존을 위해 정본 7부와 부본 1부로 총 8부를 만들었다.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처럼 정본 7부는 중국 각지에 분산 소장되었다.

  • 문연각본: 베이징 자금성에 소장. 청나라 황실의 정궁에 소장한 만큼 이쪽이 원본이다.
  • 문원각본: 베이징 원명원에 소장
  • 문진각본: 청더의 여름행궁(피서산장)에 소장
  • 문소각본: 선양의 성경궁(선양고궁)에 소장
  • 문회각본: 양저우의 대관당에 소장
  • 문종각본: 전장의 금산사에 소장
  • 문란각본: 항저우의 성곤사 행궁에 소장
  • 부본: 자금성 내 한림원에 소장

보관을 위해 따로 서고를 만들었는데 뛰어난 서고로 유명했던 닝보의 천일각을 본따 서고를 만들고 운영했으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서고 앞에 인공 연못을 축조하고 서고 뒤편에는 보호를 위한 인공산까지 축조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고전서의 수난사

  • 전장의 문종각본은 1842년 아편전쟁때 상당수가 소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것은 1853년 태평천국의 난 때 태평천국군이 전장을 공격하면서 완전히 파괴된다.
  • 양저우의 문회각본은 1854년 태평천국군이 양저우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대관당이 불타면서 소실되어버렸다.
  • 원명원의 문원각본은 1860년 영국,프랑스 등 서구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원명원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 항저우의 문란각본은 1861년 태평천국군이 항저우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장서의 대부분이 흩어졌다. 다행히 후에 항저우의 유명한 장서가였던 정씨 형제가 우연히 시장에서 포장지로 쓰이던 사고전서를 발견하고 흩어진 사고전서를 다시 모으고 복원하여 복구에 성공했다.


이후 자금성에 있던 문연각본은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참패하여 대만으로 도망칠 때 수많은 국보급 유물과 함께 대만으로 옮겨져 현재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 중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재빨리 청더의 문진각본을 베이징으로 옮겨와 베이징대 도서관에 소장했다. 선양에 있던 문소각본은 간쑤성으로 옮겨져 간쑤성 도서관에 소장 중이며 정씨 형제의 노력으로 복구된 문란각본은 항저우의 저장성 도서관에서 소장중이다.

한국과 사고전서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의 조선은 학구열이 엄청났던 정조 치세였다. 정조는 사고전서를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애를 썼다. 이에 정조 치세 후반기부터는 매년 청나라에 보내는 사신들마다 특명이 사고전서를 들여오는 것일 정도였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분량이 너무 방대한데다가[2] 7부 밖에 인쇄하지 않아서 조선이 이를 들어오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들여오려고 애썼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형수(1749-1824)나 유득공(1748-1802)의 기록들에서 정조가 사고전서를 얼마나 들여오고자 노력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서형수의 문집에 의하면 서형수가 179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조는 서형수에게 주자서와 더불어 사고전서의 구입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서형수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으나 사고전서는 들여오지 못했다. 정조의 사망 직후인 1801년에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유득공은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에 깊게 관여한 학자 기윤[3]을 만나서 주자서 구입에 대해 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기윤을 통해서 사고전서의 구입을 타진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끝내 사고전서의 도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고금도서집성을 얻는 데 성공해 규장각에 비치하는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단재 신채호 선생은 베이징에서 머무르는 동안 역사 연구를 위해 자료 탐독이 필요했고, 후스나 천두슈같은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해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자료연구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사고전서를 열람하였다.

한국에서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게된 시점은 1980년대 대만에서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본의 영인본을 내놓으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한국학계에서도 사고전서는 매우 중요하다. 방대한 중국의 문헌 가운데서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퍼즐들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워낙 내용이 방대한 탓에 한국에선 아직도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

정조와 당대 지식인들이 사고전서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사고전서 내에 조선 학자들의 문집이 수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179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기윤을 만난 서호수는 사고전서에 화담 서경덕의 화담집이 수록되었다는 보고를 정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기로는 화담집은 수록되지 않았다. 단지 사고전서총목이나 천경당서목에 서경덕의 화담집에 대한 해제와 인용이 나와있는걸로 보면 수록후보에는 올랐다가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 외에도 고려의 김구용, 조선의 권근, 정인지, 서거정, 이이, 임백령, 신광한 등에 대한 소개나 문집의 해제가 나와있기도 하다.

사고전서에는 한국인이 저술한 서적은 수록되지 못했으나, 대신 한국에 관련된 자료나, 서적들은 꽤 흥미로운 것들이 있다. 고려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온 서긍이 집필한 고려도경이 수록되었으며, 명나라 때 조선 사람이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대까지의 역사를 집필한 조선사략도 수록되었는데 비교적 고려말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또한 작자를 알 수 없고, 단지 명나라 때 어떤 사람이 집필한 듯 보이는 조선지라는 책도 수록되었는데 조선의 풍속, 지리, 제도 등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외에도 고조선부터 이씨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 관련 자료가 많아 사료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는 고대사학자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으나 전산화조차 버거울 정도로 너무 방대하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취사선택된 수록

《사고전서》에 수록한 책은 경부 66종, 사부 41종, 자부 103종, 집부 175종 4946권으로 서적의 복원, 발굴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청조의 통치에 있어서 불리한 내용이 기술된 책은 싣지 않았거나 금서를 한 부분도 엿보인다. 병부(兵部)의 보고에 의하면 건륭 39년부터 건륭 47년 사이에 24번의 분서(焚書)로 538종 1만3862권의 책이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사고전서》의 편찬으로 많은 수의 서적에 대한 금서, 분서 등의 서적파괴가 발생했다.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에서 2400여 종의 책과 목판이 불살라졌고, 400종 이상의 책이 공식적 명령에 의해 수정됐다.[1]

건륭 52년(1787년) 건륭제 자신이 몸소 《사고전서》를 열람하다 청 왕조를 헐뜯는 자구를 발견하고 《사고전서》를 다시 대대적으로 교정할 것을 명해서 최종적으로 《제사동이록》(諸史同異錄) 등 11부의 저서가 사고전서에서 삭제되었다. 다만 이들 11부의 저서는 《사고전서》에서 삭제된 뒤에도 여전히 궁중에 남아 있었고 파기되지도 않았으며 이 가운데 9부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A%B3%A0%EC%A0%84%EC%84%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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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四庫全書)는 1773년 (건륭 38년) 청 제국의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 (건륭 46년)에 편찬 및 완성된 총서이다. 전 3,503부 79,337권에 달한다. 전체 구성은 수(隋), 당(唐) 이래로 황실의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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