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실전풍수

성종 태봉 입지 분석

이지 easy 2022. 3. 2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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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창경궁에 태실복원이 되어 있는 조선 9대 왕 성종의 태봉의 입지에 관한 분석자료를  작성 중입니다. 

자료는 천인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의 2010년 성종태봉에 관한 논문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내룡맥은 한남정맥인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합니다. 남한강이 중부지방을 좌우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 서쪽에 위치한 중부지방의 산, 분당 쪽의 산들은 안성에서 위로 올라가는 산맥을 타고 있습니다.  

칠장산은 안성시를 동쪽에서 감싸고 있는 492m의 산입니다. 

칠장산
안성 칠장산 - 한남정맥을 따라 위쪽으로 산맥이 올라갑니다

 

용인 부아산
용인 부아산

한남 정맥인 용인의 부아산을 거쳐 계속 북쪽으로 진행 합니다. 부아산의 위치는 용인 동탄 신도시와 처인구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탄 신도시가 더 서쪽에 있고, 처인구청이 동쪽에 있습니다.  두 도시의 사이를 남북으로 지나가는 산맥이 한남 정맥입니다. 

 

용인 석성산
용인 석성산 - 마성터널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남부 수도권에서 동해안을 가려면 거의 50번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게 되는데요, 마성터미널을 지나게 되지요. 그 마성터미널이 470m의 석성산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 입니다. 한남정맥은 석성산을 지나서 용인시 위쪽으로 50번 도로를 따라 북서진해서 광교산581m 을 지나게 됩니다. 광교산을 지나는 한남정맥은 한강 아래쪽을 따라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마무리 됩니다.

 

분당 불곡산
S자를 그리며 이어지는 한남정맥의 산들

우측아래의 향수산이 아까 석성산에서 이어지는 산맥입니다. 크게 북서쪽으로 회전하면서 분당 불곡산으로 이어집니다.

불곡산도 점선의 서쪽은 분당 동쪽은 경기도 광주시로 나뉘어 집니다.

 

영장산
영장산

점선으로 보이는 것이 산의 능선입니다. 영장산의 정상으로 능선이 지나갑니다. 서쪽은 분당구 동쪽은 경기도 광주시 입니다. 

 

매지봉
매지봉

영장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맥은 매지봉을 거쳐 휘감아 아래쪽으로 내려와 율동공원쪽으로 내려옵니다. 

중간에 새마을로가 생겨 현재는 맥이 약간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새마을로
새마을로 동쪽을 보는 모습
새마을로
새마을로

로드뷰에서 북쪽에서 남쪽을 보면 평지가 아닌 산이 보입니다. 남쪽에서 북쪽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산맥의 중간을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동공원
율동공원

율동공원 분당저수지 북쪽에 보이는 묘터는 청주한씨에게 내려진 땅인데 그 곳에 원래 태봉이 있었습니다. 

 

태봉 뒤쪽으로 현무와 호수 안쪽에 위치한 안산은 약한 편이지만 좌우의 선익이 잘 감싸주고 있고 특히 우측의 백호선익이 잘 발달되어 여러 겹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또 호수 건너편에 조산도 잘 발달되어 비교적 안정적인 혈장의 세력이 만들어진 곳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호수의 물이 좌선수로 빠져 나가고 있고 우백호가 강해 교쇄하기 때문에 좋은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왕의 무덤은 의외로 백호가 강한 곳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곳 또한 백호가 강한 곳입니다. 후에 청주한씨에게 이 곳을 하사하고 옆으로 태봉을 옮기는데 영장산에서 동쪽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장한 태장지의 자료를 올리려 했는데 하다 보니 초기 태장지를 하고 있네요. 

영장산 까지는 똑같고 그 후에 더 우측의 땅으로 이장합니다. 

 

태전동 태봉
태전동 태봉

영장산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산맥은 남한 산성쪽으로 뻗어 있으며 오른쪽으로 뻗은 맥은 광남초등학교 까지 이어집니다.

태봉
태봉 이장지

광남초등학교에서 동남쪽으로 홀로 떨어진 동그란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곳이 태전리 태봉이 있던 곳입니다. 

좌우의 외청룡, 외백호가 잘 보이고 있습니다.  이곳은 내청룡과 내백호가 없는 장소로 물길을 우선하는 곳입니다. 

국세가 매우 큰 곳입니다.  평지 돌혈입니다. 하지만 좌청룡 우백호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을 뿐 그 뿌리는 다 제각각에서 오기 때문에 이것을 힘이 모인 지점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청룡은 북쪽의 남한산성에서 현무는 영장산에서 백호는 문형산에서 오고 있습니다. 지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작은 돌혈로 힘이 모아졌다고 보기 어려워 보입니다. 물길이 발달 했기 때문에 양기가 강해서 안정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현무에서 좌우로 이어지는 부분이 너무나 위쪽에 있습니다. 갈마터널이 청룡의 어깨부분, 영장산 남쪽이 백호의 어깨 부분인데. 그것은 능안산에서 끝납니다. 우백호를 이루는 태전초등학교 쪽의 산은 문형산에서 이어져 오는 다른 산줄기입니다. 자신이 이어져 온 현무는 너무 가늘고 힘이 없으며 좌우가 너무 두텁고 쎄보입니다. 한마디로 균형이 깨져 있는 모양입니다. 저수지 위치도 이상해서 찾아보니 중대 물빛 공원이 1957년 농업용수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저수지인 홍중저수지라고 합니다. 보통은 혈자리의 앞에 있는데 머리쪽에 있어서 이상하다 했습니다. 어쨌든 저 위치에 인공저수지가 생긴 것만 봐도 혈자리가 위치하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라는 말이 되겠지요. 율동저수지도 1960년대에 생긴 인공저수지 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위치가 절묘하게 혈자리의 앞에 위치하게 되었고, 그 전에 저수지가 없었다 해도 앞으로 감아 돌아 나가기 때문에 훨씬 좋은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교적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성종의 일대기와 태봉을 연결지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457년 탄강

1458년 2세 율동에 장태 (율동에서 22년간 태실 유지, 장태 후 11년 째에 왕위 즉위)

1469년 13세 예종의 승하로 곧바로 왕으로 즉위 (왕위 즉위 후 11년간 율동 태실)

1480년 24세 성종 11년에 율동에서 태전동으로 태봉이장 ( 태전동에서 승하까지 14년간 태실 유지 그 이후 1928년에 서삼릉으로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이봉되었으며 1930년 창경궁에 태봉산에 방치된 나머지 석물들이 이전됨 )

1494년 38세 승하  

 

태봉의 이장과 연결시켜 성종의 일대기를 살펴 보면 율동에서 22년간 유지 했으며 11년째에 바로 왕위에 즉위하였습니다. 태전동에서 승하하기 까지는 14년이 걸렸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초기 율동의 태봉이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성종 초기에 왕위 서열 3위 임에도 저항을 쉽게 무마하고 어린나이에 왕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종의 업적으로 기록된 경국대전은 사실상 세조가 80%, 예종이 20% 정도 완성한 것이며, 성종은 끝에 조금 더 보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종의 업적으로 기록된 해가 1470년과 1485년입니다. 마지막 버전은 태봉이장 후에 완성되었으나 그 이전에 거의 다 완성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태봉을 이장한 1480년 이후에는 초반기의 안정된 정치에서 벗어나 폐비 윤씨 사건 등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 그 후에 연산군, 중종, 인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세가 시작되게 됩니다. 본인도 24세에 태봉을 이장한 이후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게 됩니다.

태전동으로의 이전은 수세는 좋으나 현무에서 좌우로 이어지는 맥이 물길로 어깨 부분이 너무 멀리 있어 안정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돌혈의 파워는 좋지만 제 기준으로 항상 안정감이 0 순위가 되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태봉을 이장한 것이 잘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482년 이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난 해인데 1480년에 태봉을 이장 후 2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 율동의 태실 주변에는 청주한씨의 한계희와 한사문이 묻혀 있는데 성종의 아내가 청주한씨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 한씨입니다. 한씨들의 계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반면 성종의 후손은 현재 대가 끊어진 상태 입니다. 조선에서 가장 많은 후손을 둔 세손가락 안에 드는 왕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1491년 신해북정은 여진족을 토벌하려 한 사건인데 군사력이 매우 문약文弱해 져 지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479년 건주위 정벌 파병은 비교적 손해 없는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태봉이장 전)

그러나 1491년 니마차(尼麻車) 정벌 계획을 세웠는데 이 전투는 성과도 적었으며 성종의 위신도 떨어지는 실패한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1480년 율동 태봉 이장 후에 벌어지는 일들 입니다. 

 

결국 안정감이 떨어지는 평지 돌혈의 수세로 태봉을 이전하면서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도의 모양을 보아도 율동은 모여있고 편안해 보이는 반면 태전동은 너무 길쭉한 칼 모양이라 안정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평지 돌혈은 바람을 중요하게 생각 하지 않기 때문에 수세만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판단 기준이라고 생각되며 장풍과 득수 모두 혈의 기준으로서 무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차라리 능안산을 현무로 삼았더라면 좀더 안정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왜 득수국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면에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그런 말을 꾸며 냈는지 뭔가 의심이 됩니다.

능안산
능안산을 현무로 삼을 경우

능안산을 현무로 삼을 경우에는 태봉동 돌혈의 현무맥이 내청룡까지는 아니라도 일단 청룡이 되며 돌혈의 외청룡이 능안산의 두번째 외청룡이 되고 우백호 또한 매우 두텁고 강하게 감아 주어 훨씬 안정감 있는 모습이 되며 수구도 더욱 관쇄되는 모습입니다. 왜 저리 약해 보이는 곳을 현무로 잡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네요. 마치 왕권을 약화 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잡은것은 아닐까 싶네요.

물론 실제로 답사를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아야 하며 지금까지 본 것은 지도상으로만 해석한 것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또 과거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므로 좀 더 산이 두터웠을 것입니다. 

 

성종의 일대기와 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보면 그 연결성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것으로 보이며, 일단 대략적인 사건만으로 보았을 때 초기의 태봉에서는 큰 노력 없이 편안하게 왕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조상의 위업을 이어 받아 여러 성과를 자신의 이름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봉 이장 이후 힘을 잃었으며 많은 사건과 풍파에 휩싸이게 되는 흐름으로 진행되어 결국 폐비 윤씨와 연산군 사건등 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반면 성종의 초장 태장지를 차지한 청주 한씨 일가는 더욱 번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초장지 태봉이 좀 더 좋은 자리라 여겨 지고요, 태봉 또한 동기 감응에 의해서 태의 주인과 연결성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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